단계 3: Study Chapter 1

     

누가복음 1장: 영적인 마음을 키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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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rozen bubble shines with light.

챕터 1

[누가복음 1장 본문과 함께 이 나란히 보기를 참조하세요.

마가복음에서 누가복음까지

1. 많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서 성취된 그 일들에 관한 내러티브를 작성하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2. 그들이 우리에게 전할 때에도 처음부터 말씀의 증인이자 사역자였습니다,

3. 가장 훌륭한 테오필루스 님, 모든 일의 과정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추적 한 후 순서대로 당신에게 쓰는 것이 나에게도 좋게 보였습니다;

4. 네가 지시받은 일에 관한 확신을 알게 하려 함이라.

위에서 생각하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위한 회개를 설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여러모로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입니다. 하지만 모든 훌륭한 교향곡이 그렇듯 부수적인 주제들도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부주제 중 하나는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처음 하신 말씀에는 회개라는 대주제와 믿음이라는 소주제, 이 두 가지 주제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복음서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 복음 1:15).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원어는 μετάνοια(메타노이아)로, 문자 그대로 "위에서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메타> = 위 + <노이아> = 생각하다). 회개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애와 개인적인 야망이 종속되면서 더 높은 이상이 우세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데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평소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그 이상'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현세적인 욕망의 충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높은 진리를 믿고 그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다"와 "믿다"라는 단어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 복음 16:16) 1 .

신념에 집중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가복음에서는 회개에 초점을 맞추던 것이 점차 믿음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이러한 초점은 누가복음을 시작하면서 계속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의 첫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해 손을 잡았으니 ..." (누가 복음 1:1).

이 첫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2

믿음은 신앙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마음의 이성적이고 지적인 측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훈련된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믿거나>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물리학에 대한 자연적 진리이든 성육신에 대한 영적 진리이든 진리에 대한 이성적인 <보기>와 관련된 지적인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람의 말에 담긴 진리를 본 후 "나는 당신이 거기에 요점이 있다고 <믿습니다>" 또는 "나는 당신이 의미하는 바를 <알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서두에서 "믿음"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은 이 복음이 지성의 개방과 이해의 심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에서 "그들의 이해를 열어 주셨다"는 말을 읽을 수 있습니다(누가 복음 24:45). 3

<누가복음>의 첫 구절에는 지성을 암시하는 몇 가지 단어와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1절은 "가장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처음부터 <목격자>였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누가 복음 1:2). 말씀에서 '눈', '시력', '시야'를 가리키는 용어는 내면의 시력 또는 시력 부족을 나타냅니다. 일반적으로 "이제 알겠다"와 "이제 보인다"는 표현은 동의어입니다. 또한 "보지 못하는 사람만큼 장님은 없다.", "밝은 면을 보라.",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각각의 경우에 우리는 정신적, 영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물리적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목격자"라는 용어는 이해의 어떤 측면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3절에서 저자는 그가 "완전한 이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누가 복음 1:3). 4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각 복음서의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의 중요성에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의 단어가 그 복음서의 주요 메시지의 열쇠를 제공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누가복음>의 결론을 살펴보면 마지막 말씀이 "그들이 주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에서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하더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 복음 24:53). 여기서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언급은 우리가 감정과 느낌보다는 생각과 이성에 관여하는 마음의 수준인 인간의 지성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학습, 가르침, 교리 및 가르침의 문제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5

마찬가지로 "그들이 계속 성전에 있었다"는 구절을 읽을 때, 이 역시 우리의 사고력과 추리력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온전한 돌로 지어졌으며, 말씀 전체에서 돌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항상 성전에 있다"는 이 언급은 진리, 믿음, 신념의 문제와 관련된 인간 마음의 측면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6

누가복음은 믿음, 믿음, 교훈, 이해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찬 간략한 서론으로 시작됩니다. 네 구절로 구성된 서론이 끝나면 우리는 마음의 지적 수준에 대한 매우 명확한 언급을 남깁니다: "너희가 <지도를 받은 것들의> 확실성을 알 수 있도록"(누가 복음 1:4).

첫 구절에 믿음, 지식, 교훈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을 보면, 이 복음은 지성과 관련된 문제와 우리의 이해의 깊이에 초점을 맞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가장 확실하게 믿어지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질서정연하게" 하려는 시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주님께로 향하는 우리 마음속의 장소인 "거룩한 성전"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7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오다

5. 유대의 왕 헤롯 때에 아비야의 계통에 사가랴라 하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에게 아론의 딸 중 한 아내가 있으니 그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그들은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서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흠 없이 행하였더라.

7. 엘리사벳은 불임이었고, 둘 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8. 그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직분을 순서에 따라 행하는 동안에 이렇게 되었더라

9. 제사장 직분의 관례에 따라, 그의 제비는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는 것이었습니다.

10. 온 무리가 분향할 때에 분향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더라.

11. 분향단 오른쪽에 서 있는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12. 사가랴가 그를 보고 괴로워하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니라.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 간구가 들리니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하니라

14. 너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요 많은 사람이 그의 나심을 기뻐하리라.

15. 이는 그가 주께서 보시기에 크시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임이니라.

16. 이스라엘 자손 중 많은 사람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며

17. 그가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그의 얼굴 앞에 나아가서 아비들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며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행하게 하며] 주를 위하여 준비된 백성을 [주를 위하여] 준비하게 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찌 알겠나이까 나는 노인이요 내 아내는 연로하였나이다.

지성과 이해를 암시하는 단어들로 가득 찬 간략한 소개가 끝난 후, 우리는 제사장 사가랴에 대해 읽습니다: "유대 왕 헤롯 시대에 사가랴라는 어떤 제사장이 있었다"(누가 복음 1:5). <누가복음>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성전에서 <일하는> 한 사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는 인간의 이해가 제대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8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사가랴가 "유대 왕 헤롯의 시대에"(누가 복음 1:5). 헤롯은 타락한 세습 의지를 그려냅니다. 그것은 우리의 낮은 본성, 즉 스스로를 전능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데 열중하는 우리의 일부입니다. 스스로를 옳고 그름의 유일한 중재자로 설정하는 것은 인간 마음의 일부입니다. 그 어떤 경쟁자도, 심지어 왕 중의 왕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내와 세 아들, 삼촌, 장모, 처남을 살해하고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헤롯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신의 권력에 대한 모든 위협을 의심하는 그는 자신의 부패한 의지에 반대하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진실을 탄생과 동시에 파괴하려고 노력합니다. 헤롯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권력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마태 복음 2:16).

그러나 더 높은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대표하는 사가랴는 자신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인정하고 순종적으로 그 힘에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서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였다"고 읽습니다(누가 복음 1:6). 헤롯과 달리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이 시점에서 그들은 "엘리사벳이 불임이었고 둘 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자녀가 없습니다(누가 복음 1:7). 9

우리가 사가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주님의 성전에서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삶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성전에서 위로 올라가는 부드럽고 달콤한 향의 연기는 기도가 우리 마음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가랴가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사가랴야, 네 기도를 들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누가 복음 1:13). 10

태어날 아들의 이름은 "요한"이 될 것입니다. 그는 자라나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처음 접하는 기본적인 이야기와 문자 그대로의 진리인 말씀에 대한 진정한 애정에서 시작하여 진리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열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의 첫 번째 단계이며, 세례 요한의 탄생으로 대표됩니다. 천사가 말했듯이, 요한이 세상에 오면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며, 많은 사람이 그의 탄생을 기뻐할 것"입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누가 복음 1:15). 다시 말해, 세례 요한(말씀의 문자적 의미)은 말씀의 내적 의미, 즉 말씀의 영혼도 포함할 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사라지고 영적 의미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육체는 쇠약해지더라도 영은 계속 성장합니다. 11

그러나 이것은 즉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브리엘이 엘리자베스가 실제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사가랴는 여전히 의심합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가 말합니다. "나는 노인이고 내 아내는 연세가 많기 때문입니다."(누가 복음 1:13). 사가랴의 질문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이해를 대변합니다. 사가랴는 "나는 늙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질문은 의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아닌가?" 이 에피소드에 담긴 대답은 "아니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길로 걷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배우기에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영적 가르침과 배움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12

엘리자베스, 임신하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내가 네게 말하여 이 기쁜 소식을 네게 전하려고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20. 보라, 네가 그 때에 이룰 내 말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네가 침묵하고 말하지 못하리라.

21. 백성이 사가랴를 기다리다가 그가 성전에 머무는 동안에 놀랍게 여기더라.

22. 그가 나올 때에 그들에게 말하지 못하매 그들이 그가 성전에서 환상을 본 줄로 알았더니 그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표적을 행하고 벙어리가 되니라.

23. 그의 사역의 날이 차매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떠나시니라.

24. 이 날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다섯 달 동안 몸을 숨기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보시던 날에 내게 이같이 행하사 사람들 가운데서 나의 수치를 없애시려고 하셨나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향처럼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사가랴가 대표하는 마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깊이 영향을 받고, 여인이 아이를 낳듯이 그 진리를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으로 가져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이것이 엘리자베스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까지 그녀는 영적으로 불모의 상태에있을 것입니다. 그 불모의 원인이 의심스러운 이해(사가랴)나 주저하는 의지(엘리자베스), 또는 둘 다에 기인하든 영적 불모의 원인은 온전한 믿음의 결여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확실할 때("가장 확실하게 믿는다"), 믿음과 행동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개인은 영적인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불확실성, 망설임이 있을 때마다 불모의 열매가 맺힙니다.

사가랴서에서 이러한 불확실성의 상태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믿음,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이해 때문에 주님을 고백할 수 없는 침묵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을 다시 살펴보면, 믿음에 따르는 표적 중 하나가 "그들이 새 방언으로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마가 복음 16:17).

하지만 사가랴의 과묵함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사가랴가 내면의 소란을 잠재우면 의문과 의심, 불확실성이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그는 더 깊은 묵상과 기도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가랴의 모습은 겸손하고 기꺼이 배우려는 자세, 수용적이며 가르침을 받기를 열망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경전을 찾고 묵상하며 주님의 말씀의 경이로움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조용히 성찰하는 이 시간 동안 영적 비전이 생겨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보게 되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한 성찰이 매우 중요합니다. 묵상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시간입니다.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에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왔을 때 ... 그들은 그가 환상을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누가 복음 1:22)

사가랴가 성전에서 나와야 할 필요는 있었지만, 성전에서 봉사를 마칠 때까지는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때 그의 아내는 임신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성전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가랴의 면이 있습니다. 성전에 머무르며 묵상과 기도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필수적이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부와 기도의 성전을 떠나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가랴처럼 우리는 먼저 이해를 발전시켜야 하고, 비전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성전에 오래 머물러야 하며, 그 비전이 우리를 유용한 노력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니"(누가 복음 1:24).

또한 이 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높은 곳에서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누가 복음 24:49). 따라서 이 복음, 즉 이해의 개혁에 초점을 맞춘 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하고 <성전에서> 끝납니다.

더 큰 기적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사렛이라는 갈릴리의 한 도시로 보내졌다,

27.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 하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에게로 보내졌는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하였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나아와 이르시되 크게 은혜를 입은 자여 찬송하리로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시니

29.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고민하여 이것이 무슨 인사로 할까 생각하니라.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도다 하니

31. 보라 네가 태중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는 크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니 주 하나님이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라:

33. 그가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리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하니라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하더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잉태하였으니 불임이라 일컬음을 받은 지 여섯 달째 되는 날이라

37.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니 39. 천사가 그녀에게서 떠나니라.

세례 요한의 잉태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노부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참으로 기적입니다. 그러나 다음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더 큰 기적, 즉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느님에 의해 나사렛이라는 갈릴리의 한 도시로 보내졌는데, 그곳에는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약혼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천사가 와서 그녀에게 이르되 '크게 기뻐하라 주님이 너와 함께 계시고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누가 복음 1:26-28).

요한의 탄생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대한 각성된 이해를 나타내지만, 자손을 낳기 위해 사가랴의 협력이 필요했던 것처럼 여전히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 즉 우리 인간 이해의 협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더 깊은 문제에 관해서는 인간의 이해가 제한적인 역할을 합니다. 요셉으로 대표되는 영의 주요 기능은 새로운 통찰력과 새로운 애정의 탄생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탄생은 인간이 아닌 신성한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탄생은 인간이 아닌 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13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만남 (선과 진실의 만남)

39. 마리아가 이 날에 일어나서 서둘러 산골짜기 유다의 한 도시로 들어가서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서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라.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를 듣고 아기가 태에서 뛰니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니라;

42.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네 태의 열매가 복이 있도다 하더라

43. 이것이 어찌하여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로 오시게 되었나이까

44. 주의 찬송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니 아기가 기뻐서 내 태에서 뛰었나이다.

45.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임이니이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영화롭게 하도다 하니라

47.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도다.

48. 이는 그가 그의 여종의 낮은 처지를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복이 있다 하리라.

49. 이는 전능하신 이가 내게 큰 일을 행하셨음이라 그의 이름이 거룩하니이다.

50. 그의 인자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대대로 미치리로다

51. 그가 팔로 힘을 보이시며 교만한 자들을 그들의 마음의 상상 속에서 흩으셨도다.

52. 왕자들을 왕좌에서 내리시며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도다.

53. 주린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셨고 부한 자를 비워 보내셨도다.

54. 그의 종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주셨으니 이는 그가 인자를 기억하게 하려 하심이라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영원히 향하사

56. 마리아가 약 석 달을 그와 함께 거하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때가 찼으므로 아들을 낳으니라

58. 그녀의 이웃과 친족들이 주께서 그녀에게 인자하심을 크게 베푸셨다는 말을 듣고 함께 기뻐하니라.

사람들이 진리를 새롭게 보게 될 때,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더 분명한 이해의 빛으로 고양될 때 어느 정도의 흥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지적 흥분과 새로운 수준의 이해가 그것에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의 탄생과 결합될 때 경험할 수 있는 기쁨 사이에는 엄청난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만나는 이 큰 기쁨의 순간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성경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 때에 일어나서 서둘러 유다의 한 도시인 산간 지방으로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서 엘리사벳을 맞이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듣고 아기가 태에서 뛰니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하더라"(누가 복음 1:39-41).

엘리자베스는 이 놀라운 경험에 기뻐하고 놀라워합니다. 하지만 왜 이런 경험이 자신에게 주어졌는지 궁금해합니다. 이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선한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납니다. 이 "발생"은 마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세례 요한"이라고 불릴 아들을 임신 한 사촌 엘리자베스를 방문하는 것으로 대표됩니다. 마리아가 도착하자마자 엘리사벳의 아들이 뱃속에서 뛰쳐나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우리 삶에서 어떤 진리(세례 요한)가 선으로 만져질 때 살아나는 그림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왜 자신에게 이런 특권이 주어졌는지 궁금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가 내게 오시게 하는 것이 어찌하여 내게 허락된 것입니까?" (누가 복음 1:43). 그녀의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자궁에 품고 있는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무엇일까요? 엘리자베스 자신이 마리아를 찬양하면서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임이니라"(누가 복음 1:45).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핵심적인 말씀이며, 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믿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건강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듣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마음에 품고 그 진리를 삶에 실천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다른 사람이 진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학식이 있는 권위자가 '이런 것은 믿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훨씬 더 깊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정말 사실'이기 때문에 '정말 그렇다'는 복된 인정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항상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반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단순히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각의 은사이며, 우리가 진실을 진실이라고 <지각>하기 때문에 진실을 믿을 수있는 축복받은 능력입니다. 이 복된 확신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

우리가 믿음의 상태에 빠질 때마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 마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이것이 사실입니다"라고 안심시켜 주시는 듯한 느낌이 동반됩니다. 믿음은 어떤 것이 참인지 아닌지에 대한 내면의 지각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핵심 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분이 구원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할수록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가장 깊이 믿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15

더 네이밍 오브 존

59. 여덟째 날에 그들이 그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러 오니 그들은 그를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 불렀을 것이다.

60. 그의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만 요한이라 하리라 하니라.

61. 그들이 이르되 네 동족 중에 이 이름으로 불리는 자가 없느니라 하니라.

62. 그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그가 어떻게 부르게 할 것을 징조로 삼고

63. 그가 석판을 구하여 써서 이르되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하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64. 그의 입이 즉시 열리고 혀가 [풀려] 하나님을 찬송하며 말하였다.

65. 그 주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하니 이 모든 말이 온 유대의 산간 지방에 소문이 났더라.

66.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마음에 품고 이르되 그러면 이 아이가 어찌 되리이까 하니라. 이는 주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라.

67.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68.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그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찾아오사 구원을 이루셨도다,

69. 그의 종 다윗의 집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도다.

70. (옛적부터 그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으로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의 원수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을 얻었도다;

72.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시며;

73.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와

74.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기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75. 우리 평생에 그 앞에서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76. 아이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는 네가 여호와의 얼굴 앞에 나아가서 그의 길을 예비할 것임이니라;

77. 이는 그의 백성에게 구원의 지식을 주어 그들의 죄를 사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78. 우리 하나님의 부드러운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높은 곳에서 날이 새어 우리를 방문하시리로다,

79.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를 비추시며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80. 그 아이가 자라서 심령이 강건하여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 날까지 광야에 있더니 80.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은 후,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가 왔습니다. 모두들 아기의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로 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아니요, 그의 이름은 요한이 되리라"(누가 복음 1:60). 친척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가랴가 말할 때가 되자, 그는 필사판을 요청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입니다"라는 간단한 단어를 적었습니다.누가 복음 1:63). 그 직후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침묵이 사라지고 그는 주님을 향한 찬양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이 있도다 그가 자기 백성을 찾아오사 구속하시고 그의 종 다윗의 집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일으키사 ... 우리를 대적에게서 구원을 얻게 하셨도다"라고 그는 말합니다.누가 복음 1:68-71).

사가랴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영으로 가득 찬 말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가득합니다. 예언을 이어가면서 그는 새로 태어날 아들이 성취해야 할 사명에 대해 직접 이야기합니다: "아이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주님의 얼굴 앞에 가서 그분의 길을 예비하고 그분의 백성에게 구원의 지식을 주며 ...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을 주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임이니라"(누가 복음 1:76, 77, 79).

원래 우리는 사가랴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늙은 제사장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가랴를 성령으로 충만한 변화된 존재로 봅니다. 그는 더 이상 이전 교회의 신앙, 즉 아무리 선의와 의로움이 있어도 의식과 전통에 대한 순종에 기초한 신앙을 대표하던 늙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옛 교회', 즉 기도의 동작은 취했지만 굳건한 믿음은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전 신앙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지조차 의심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사가랴에게 "네 기도를 들으셨다"라고 말하며 의심의 여지를 없앴습니다. 그런 다음 천사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덧붙였습니다."당신의 아내 엘리사벳이 당신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며, 당신은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부를 것입니다."(누가 복음 1:13).

물론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천사의 말은 사실이었으며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사가랴는 이제 하나님이 실제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영적 차원에서 이것은 믿음의 힘에 대한 중요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모든 근심, 걱정, 염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부와 명예에 대한 우리의 간구는 만족스럽지 않을지라도 인내, 용기, 사랑, 이해에 대한 우리의 기도는 항상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만, 우리는 먼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누가 복음 1:79).

이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우리는 요한이 "성장하여 심령이 강해져서 이스라엘에 나타나시는 날까지 광야에 있었다"고 읽습니다(누가 복음 1:80).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우리 삶에서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즉각적인 결과나 말씀의 이야기와 우리의 일상 활동 사이에 특정한 연관성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말씀의 문자적 진리에 주님의 선하심이 닿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며, 새로운 적용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메시지는 신성한 성경에 뿌리를 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더 깊은 차원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안에 있는 세례 요한이 한동안 "광야에" 머물러 있더라도, 우리가 말씀과 그 말씀을 주신 분께 충실하다면, 그 문자 그대로의 진리는 점점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삶에서 사랑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까지 "영적으로 더 강건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성장하여 영이 강해져서 이스라엘에 나타나시는 날까지 광야에 있었다"(누가 복음 1:80)

각주:

1천국의 신비 9032: “내적인 의미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며, 거듭난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통해 사랑과 자선의 선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영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 언급 된 진리가 종교적 가르침에 제시된 진리와 일치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불신자는 세례를 받을 수 없고, 즉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마가복음 말미에서 회개가 우선이라고 지적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 순서로는 마음의 개혁 또는 이해에 기반한 건전한 믿음의 확립이 있습니다. 참조 참된 기독교 571: “회개 다음 순서, 개혁.... 개혁은 이해에서 출발한 사고의 상태입니다."

3종말 설명 1100:23: “오늘날에는 이해가 믿음에 대한 순종 아래 유지되기를 바라며, 어떤 것을 믿어야 하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지적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참조 요한계시록 풀이 914: “맹목적인 믿음은 이해와 분리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습니다: '눈먼 자들의 눈먼 지도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도랑에 빠지느니라'(마태 복음 15:14)…. 그러므로 내 친구여, 주님께 가서 악을 죄로 여기고 오직 믿음으로만 거부하면 이해력이 열리고 놀라운 일을보고 영향을받을 것입니다."

4천국의 신비 2148: “말씀에서 '눈'은 내면의 시력, 즉 이해를 의미합니다."

5묵시록 설명 204:6: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는 진리의 교리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6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8988:5: “일반적으로 '돌'은 진리를 의미하며, '보석'[원석]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온 진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1298: “성전의 제단은 다듬지 말고 온전한 돌로 쌓으라는 명령이 있었고, 그 위에 쇠를 옮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신명기 27:5-7; 여호수아기 8:31). 다듬은 돌과 철이 사용된 돌은 인공적인 것과 사람의 추론과 상상력에서 나온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7천국의 신비 2048: “'성전'이라는 단어는 사람에 대한 믿음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3700:2: "성전이 언급될 때 천사들에게 진리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도 참조하세요. 성전은 돌로 지어졌고, 말씀 전체에서 돌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을 읽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8941:6: “예루살렘의 성전은 통돌로 지어졌습니다.... '주님의 성전'은 신성한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8천국의 신비 10327: “제사장은 주님의 영적 왕국의 대표를 의미하며, 향은 진리에서 나온 예배의 대표를 의미합니다."

9묵시록 설명 638:13: “내적 의미, 즉 말씀의 정신적 의미에서 '아내'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의미합니다."

10천국의 신비 9475: “향은 감사, 숭배, 기도와 같이 기쁨으로 인식되는 예배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11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5620:12: “세례 요한은 지상에서 신성한 진리인 말씀에 관해 주님을 대표합니다.... '낙타 털로 된 옷'은 진리에 관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내적 의미의 옷이라는 의미)와 같이 말씀이 자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머리카락'과 '낙타'로도 상징됩니다. 그의 '메뚜기와 야생 꿀의 음식'은 선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같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기쁨은 '야생 꿀'로 표시됩니다." 참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4857:3: “사람의 영이 사람의 몸 안에 살듯이 영적 감각은 문자 그대로의 감각 안에 살아 있습니다. 사람의 영처럼 영적 감각은 문자적 감각이 사라져도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 감각은 말씀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주님의 신성한 섭리 334: “모든 천사는 지혜 안에서 영원까지 온전합니다. 그러나 각 천사는 세상을 떠날 때 가졌던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의 정도에 따라 온전해집니다. 이 정도에 따라 영원에 이르기까지 온전해집니다.

13종말 설명 475:20: “요한은 그들[유대인]에게 주님을 존중하는 말씀에 대한 지식을 심어 주님을 영접하도록 준비시켰을 뿐이지만, 주님께서는 친히 신성한 진리와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선으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14신앙에 관한 새 예루살렘 교리 1-2: “오늘날 '믿음'이라는 용어는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이해하기에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들었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이것이 바로 믿는 이유라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믿음은 미지의 것에 대한 믿음이며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그 일이 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것이 참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15신앙에 관한 새 예루살렘 교리 36: “기독교 신앙의 보편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음으로써 주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구원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없으므로 이것 또한 그분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