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 3: Study Chapter 1

     

마태복음 1장의 의미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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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ctually a painting of Joseph's second dream, when he is warned by an angel that Herod will seek to kill the baby Jesus. We're using it here to illustrate Joseph's first dream, when an angel tells him that Mary's baby will be the Messiah. By Workshop of Rembrandt - Web Gallery of Art:   Image  Info about artwork, Public Domain.

예수 그리스도 세대의 책


1.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관한 책입니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느니라;

3. 유다가 다말의 페레스와 사라를 낳고 페레스는 헤스롬을 낳고 헤스롬은 아람을 낳으니라;

4. 아람이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아손을 낳고 나아손은 연어를 낳으니라;

5. 살몬은 라합의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의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더라;

6. 이새가 왕 다윗을 낳고 왕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였던] 그녀에게서 솔로몬을 낳으니라;

7. 솔로몬이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이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가 아사를 낳으니라;

8. 아사가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이 요람을 낳고 요람이 웃시야를 낳으니8;

9. 웃시야가 요담을 낳고 요담이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가 히스기야를 낳으니라;

10. 히스기야가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가 아몬을 낳고 아몬이 요시야를 낳으니라;

11. 요시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에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에 여고냐가 살라디엘을 낳고 살라디엘이 스룹바벨을 낳으니라;

13. 스룹바벨이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이 아조르를 낳으니13;

14. 아조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힘을 낳고 아힘은 엘리우드를 낳으니14;

15. 엘리우드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므단을 낳고, 므단은 야곱을 낳으니라;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그에게서 그리스도로 불리는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17.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모든 세대가 열네 대이고,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이고,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입니다.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

마태복음에 따르면 복음서의 첫 단어는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관한 책"입니다. 이 문장의 첫 단어는 그리스어 원어로 비블로스 [Βίβλος]로 "책"을 뜻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책은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서면 또는 인쇄된 페이지의 모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단순한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 즉 인간의 후손이며 특정한 혈통을 가진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관한 책"(1:1). 그 시점부터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삭으로 내려가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야곱으로 내려가고, 그 후 "이스라엘 자손"으로 알려진 야곱의 아들들로 내려가는 하강 계보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하향 계승은 "우리아의 아내였던 그녀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왕"으로 묘사되는 다윗까지 14대에 걸쳐 계속됩니다(1:6). 다윗의 간음에 대한 이 언급은 인류의 도덕적 타락을 암시합니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면서 "바벨론 포로기"라고 불리는 14세대의 쇠퇴가 절정에 달하고, 그 후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까지 14세대가 더 이어진다고 묘사됩니다.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모든 세대가 열네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도 열네 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부터 그리스도 탄생까지도 열네 대입니다."(1:17).

언뜻 보기에 14세대를 세 세트로 나눈 것은 족보 기록의 단순한 시간 표시일 뿐, 역사적 목적에는 도움이 되지만 영적인 의미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모든 세부 사항, 심지어 이름 목록에도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 가지 측면에서 이 이름 목록은 아브라함에서 다윗, 바빌론 포로기,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하강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의 족보는 무한한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가 하늘을 통과하여 마침내 이 땅에 탄생한 하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처음에 무한한 신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가장 높은 하늘의 천상의 사랑을 취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윗"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그 다음으로 높은 하늘과 관련된 신성한 진리를 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한한 사랑과 지혜가 자연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처녀의 자궁에서 막 태어나려는 아이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분은 하늘을 굽어보고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발 아래에는 짙은 어둠이 있었습니다."(시편 18:9). 1

"그분의 발 아래 짙은 어둠이 깔렸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당시의 세상 상황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길을 잃고, 그들을 인도할 신성한 진리의 빛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무한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에서 구원받아 이 땅에서도 천국의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영적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늘에 절"하시고 내려오신 이유입니다. 2

바빌론의 포로

이 영적 속박은 인류가 "바빌론 포로"라고 불리는 곳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대표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기는 많은 유대인들이 고향인 유다에서 강제로 끌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시기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탄생 약 600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예루살렘의 점령과 당시 유대인 예배의 중심이었던 솔로몬 성전의 파괴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전 파괴는 60~70년에 걸친 바빌론 유배와 함께 유대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로 기록됩니다. 다윗 시편에 기록된 대로 "바벨론 강가에서 우리가 시온을 기억하며 거기 앉아서 울었도다"(시편 137:1).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암울한 시기는 우리 삶의 암울한 시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나 하나님에 대한 생각 없이 나 자신에만 관심을 가질 때마다 우리는 영적으로 말하자면 "바빌론의 포로"가 됩니다. 바빌론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가 바빌론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 때, 우리는 낮은 본성의 노예가 됩니다. 더 나쁜 것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통제하여 그들이 우리의 명령을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보다는 오만하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뜻을 행하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의 '바빌론'입니다. 3

우리가 이런 영적 포로 상태에 빠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더 의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14세대가 더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완전한 영적 어둠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생각이 부족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내거나 거짓 선생을 따르거나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만을 신뢰합니다.

한 가지가 아니었다면 모든 것을 잃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삶에는 거룩하고 순수하며 의로운 무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 너머에 있는 무언가,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높고 고귀한 무언가가 있다는 희미한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어두운 밤에 별 하나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창세기 1:3).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마태복음의 첫 17절은 인류가 점진적으로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또한 하늘을 통해 신이 강림하신 것, 즉 하나님이 우리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우리가 있는 곳에 우리를 만나러 오신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탄생'의 연속으로 묘사되는 이 첫 구절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 우주의 무한하신 하나님이 "하늘을 굽히시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한 채 지상으로 내려오신 과정을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한한 영광을 드러내신 이 과정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만약 그분이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며 지상에 오셨다면 아무도 그분의 임재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는 그분의 사랑의 타오르는 열기에 압도당하고 그분의 진리의 광채에 눈이 멀어 버렸을 것입니다. 마치 구름과 대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여과되지 않은 태양 자체가 지상에 닿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무한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유한하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옷을 입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천상의 사랑의 부드러운 온기와 영적 진리의 부드러운 빛이 우리의 수용 능력에 맞춰 지상에 탄생했습니다. 4

성경의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해에 맞춰져 있지만 무한한 차원의 천상의 사랑과 신성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사랑과 더 밝은 진리의 저장고 역할을 합니다. 육체가 영혼을 담는 외적 그릇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문자 그대로의 성경은 내면의 영혼을 담는 신성한 창고 역할을 합니다. 5

악에 대한 유전적 경향

이 복음의 첫 구절은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으로 이어지는 세대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는 출생의 연속을 묘사합니다. 인류의 점진적 쇠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하향적 진행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악에 대한 유전적 성향이 점차 축적되는 것을 묘사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러한 유전적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내 나라 내 말을 들을지어다. 내게서 교훈이 나올 것이며, 나의 정의가 열방의 빛이 될 것이다."(이사야 51:4). 그러나 사람들은 듣기를 거부하고 외면했습니다. 기록된 대로 "내가 불러도 듣지 않았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잠언 1:24). 또한 "내가 너희에게 거듭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고,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였도다"(예레미야서 7:13).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당시의 상황입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악에 대한 유전적 성향이 축적되어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거나 선과 악을 구별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포로가 되어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선지자를 통해서도, 환상을 통해서도, 꿈을 통해서도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직접 오셔야만 했습니다. 6

실제 적용

마태복음의 첫 구절은 인류가 점차 어둠 속으로 타락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사실이지만,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적인 예로, 특히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시는지 생각해 보세요. 성경 구절을 통해서인가요? 누군가의 댓글을 통해서인가요? 떠오르는 따뜻한 기억을 통해서인가요?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실지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보세요.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이 오시리니 침묵하지 않으시리라"(시편 50:3).

조셉, 깨어나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19. 그리고 그녀의 남편 요셉은 정의롭고 그녀를 공적인 악명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고 그녀를 개인적으로 보내려고했습니다.

20. 요셉이 이런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에게서 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하시니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다.

22.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셨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 하심이라,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곧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지시한 대로 하여, 그의 아내를 취하였다,

25. 그가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알지 못하였고 그 이름을 예수라 불렀더라


우리가 보았듯이, 마태복음 첫 17절은 인류가 가장 낮은 지점에 있을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의 몸에 그분의 무한함을 입히시는 유일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한 후, 둘이 합쳐지기 전에 성령의 자녀를 낳았다"(1:18)

당시에는 약혼이 법적 계약이었습니다. 나중에 공식적인 예식이 뒤따랐지만, 혼인 계약은 남편이 이혼 증명서를 발급해야만 끝낼 수 있는 언약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신명기 24:3).

요셉은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마리아를 몰래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마리아를 공개적인 굴욕과 처벌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요셉은 율법에 기꺼이 순종하지만 마리아를 공개적인 수치심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그가 마리아를 사적으로 보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9장).

요셉이 자신의 행보를 고민하고 있을 때 꿈에 천사가 찾아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왕의 혈통을 상기시키며 "다윗의 아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를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녀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0-21).

앞서 언급했듯이 요셉은 율법을 잘 알고 충실히 실천한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율법에 이스라엘 자손을 포로에서 인도할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야의 오심에 관한 많은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일은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것을 이루려 하심이라 해석하건대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니라"(1:23).

요셉이 율법에 몰두하고 더 높은 것을 보지 못하는 한, 그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700년 전에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상기시켜 주었을 때 그는 깨어났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기록된 대로(이사야 7:14).

아마도 이 고대 예언의 기억이 요셉에게 무언가를 자극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지시하는 대로 행하고 아내를 취하였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가 맏아들을 낳기 전에는 그녀를 알지 못하였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불렀더라"(1:24-25).

실제 적용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성령으로 나셨다는 천사의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더 높은 현실로 깨우쳐 주시는지를 묘사합니다. 우리는 점차 우리의 가장 높은 생각과 가장 부드러운 감정이 영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연적인 자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자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혜로운 통찰과 좋은 일에 대한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는 경향에 유의하세요.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여러분이 이러한 하늘의 특성의 원천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신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고귀한 생각, 여러분이 느끼는 모든 사랑의 감정,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자선적 행동의 공을 하나님께 돌리세요.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이 아니라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생겨난 것입니다. 7

각주:

1AC 1025:2: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씨를 언급할 때 사랑 또는 자선을 의미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천상의 사랑을, 이삭은 영적인 사랑을 나타내며, 둘 다 내면에 속하는 사람이고 야곱은 외면에 존재하는 사람과 동일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대해 읽는 동안 천사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들에 의해 대표되고 그렇게 의미되는 실제 사물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참조 항목 AC 4763:3: “왕의 말씀, 특히 다윗의 말씀은 신성한 진리를 상징합니다."

2AC 4391:2: “'그분의 발 아래 짙은 어둠'이라는 문구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들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상대적으로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참고 항목 AC 1783:2: “하늘의 빛이 나타나면 세상의 빛은 짙은 어둠과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세상의 빛 속에 있으면 하늘의 빛이 나타나도 짙은 어둠과 같을 것이니, 이는 사람의 마음과 같아서 모든 것을 인간의 지혜나 기억-지식 속에 두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지혜가 모호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의 지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지혜가 일종의 모호한 일반사상과 같아서 하늘의 광선이 없으면 짙은 어둠과 같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3AE 811:8: “추상적인 의미에서 '바빌론의 왕'은 파괴하는 악을 의미합니다." 참조 항목 SD 1130: “바빌론이 의미하는 사람들은 온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최악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명령을 행사하는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참고 항목 AE 622:6: “바빌론의 왕은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모독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마시고 더러운 사랑에 적용합니다. 그들은 특히 통치에 대한 사랑, 심지어 모든 신성한 권력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데에도 그것을 적용합니다."

4AC 8760:2: “신성한 선 자체는 무한한 열정의 불꽃, 즉 사랑의 불꽃이며,이 불꽃은 하늘에있는 천사가 견딜 수 없습니다. 태양의 불꽃이 중간 단련없이 그를 만지면 천사도 사람처럼 소멸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신성한 진리인 신성한 사랑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 그 자체의 불 같은 광채에서 줄어들지 않고 흘러 들어온다면 하늘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할 것입니다."

5. 드베르보 20: "말씀의 모든 거룩함은 문자적 의미에 있으며, 문자적 의미 없이는 영적 의미의 거룩함도 없다.... 문자적 의미가없는 영적 의미는 용기가없는 내용물과 같아서 그것을 담을 그릇이없는 포도주처럼....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입으신 것은 문자적 의미의 말씀, 즉 궁극적 차원의 신성한 진리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6AC 4180:5: “인류가 사랑과 자선의 선에서 떠났을 때, [영적 빛]이 하늘을 통해 더 이상 제공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지혜와 지성이 인류에게 전달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은 필요에 의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조 자료 DP 328:7-8: “교회가 쇠퇴하고 타락하고 깨끗한 완전성을 잃는 것은 주로 유전적 악의 증가로 인해 후계 부모가 물려받은 악에 새로운 악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곳에 종교가 있을 것이며, 모든 종교에는 구원에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규정하십니다."

7DP 321:4: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진리처럼 믿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결과적으로 천사적인 것입니다." 참고 자료 천국의 신비 2883: “사람들은 스스로 선을 행하고 스스로 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모든 선과 모든 진실은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개혁을 받은 후에는 이를 생각하고 믿어야 하며,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참조 자료 천국과 지옥 302: “우리가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거나 악에 대한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악이 들어오면 그 악을 지옥으로 되돌려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으로부터의 유입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에게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악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우리가 받아 마땅하다는 느낌으로 선을 더럽 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