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그러나 이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이 본질적으론 세 분 하나님들이지만 이름만 한 분 하나님이신 지, 또는 하나의 실체에 세 개의 개체들이 있는 것, 즉 한 분 하나님에 여러 가지 특질이나 특성들이 있는지, 또는 다른 방법으로 이해되는 지는 이성의 도움이 없이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구주이신 주 하나님께 나가고, 그분의 보호 아래에서 말씀을 읽는 것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분은 말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이 깨닫게 해주실 것이고, 진리들을 보게 하실 것이며, 이성을 깨우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주님께 나가지 않는다면, 비록 말씀을 수천 번 읽고, 그 속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유일성을 본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각자 하나님이신 세 분의 신성한 인격들이 있음과 세 분의 하나님들이 있다는 것 이외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지각에 모순되기 때문이며,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비록 세 분 하나님들이 진리 안에 있을 지라도, 셋이라 하지 않고, 한 분이라는 신앙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리로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비난으로 압도당하지 않도록, 이러한 내용에 특히 이해성을 가두어 두어야만 하며, 신앙에 순종하도록 묶여 있다. 이것이 언제나 기독교회 안에서 기독교 질서의 법칙을 세워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비성 산물이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말씀을 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말씀을 읽지 않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총명 아래에서 말씀을 읽으며, 이것은 올빼미들같이 그러한 사실에 관하여 영적 빛 가운데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교회의 모든 본질적인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삼위일체에 관한 것과 같은 것을 말씀 안에서 읽을 때, 비록 셋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들은 하나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마치 지성소로부터 대답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입 속에서만 오물거리는 것이다. 만약 그의 눈앞에 놓인다면, 눈이 없이 보는 것처럼 이해성이 없이 그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흑암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수수께끼 같이 되어 버릴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총명으로 말씀을 읽는 것은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 자들과 주님만을 예배하고 접근하지 않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노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것이며, 똑바로 걷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고, 결국엔 반대쪽으로 걸어가 돌에 부딪치거나 넘어지고 말 것이다. 이들은 또한 나침판이 없이 항해하는 선원들처럼 배를 암초 위로 항해하여 좌초시키는 것과 같으며, 또한 이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들판을 걷는 자들처럼 전갈을 보고도 새 인줄로 착각하여 그것을 손으로 잡을 때 독침에 찔려 심한 상처를 입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씀을 읽는 자는 논병아리나 솔개와 같아서 수면 위에서 커다란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의 일부만을 보고, 그 위로 날아가 낚아채다가 물고기에 의해 아래로 끌려 들어가 물속에 빠져드는 것과 같으며, 이는 또한 안내자나 구명줄도 없이 굴속으로 들어가는 자들과 같아서 그가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주님의 보호 아래가 아닌 자신의 총명의 보호 아래에서 말씀을 읽는 자는 아르고스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보다도 더 많은 눈을 가진 살쾡이처럼 자신을 믿으며, 내면적으론 어떠한 진리도 보지 못하고 거짓만을 보며, 스스로 이것이 참이라고 믿을 땐 북극성처럼 그에게 나타나서 그 방향으로 그의 모든 사상들을 뻗어 나가며, 이때 그는 진리들을 방파제 이상으로는 보지 못하거나, 어떠한 사실들을 본다고 하더라도 스스로를 자신의 환상에 좋을대로 결합시켜, 말씀의 거룩한 것들을 왜곡시키고 위화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