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투옥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가르치심을 마치신 후에, 그분은 그 도시에서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2.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듣고 제자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3. 이르되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 우리가 다른 이를 기대해야 하리이까?" 하더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보고하라."4:
5.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6. 그리고 [그는] 내 안에서 누구든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7. 그들이 가면서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인가?
8. 그러나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 보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왕의 집에 있느니라.
9. 그러나 무엇을 보려고 나왔느냐? 선지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선지자보다 더 많은 것을 보리라.
10. 이는 '보라 내가 주의 얼굴 앞에 내 사자를 보내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리라'고 기록된 그 [사람]이니이다.
11.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가 누르고 누르는 자들이 그것을 붙잡았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은 요한 때까지 예언했습니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한다면 그는 오실 엘리야입니다.
1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제자들은 조직되고, 가르침을 받고, 파송되었습니다. 각 제자는 우리 영적 삶의 중심이 되는 영적 원리를 대표하기 때문에 '우리 안의 제자', 즉 우리의 핵심 영적 원리가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흩어져 있던 우리의 자비로운 애정과 고귀한 생각이 주님에 의해 조직화되고, 구체화되고, 행동할 준비가 되어 파송될 수 있는 방법을 묘사합니다. 1
그 과정에서 주님은 지속적인 평형 상태를 유지하여 우리의 영적 자유를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꽤 잘 지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외부 세계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구원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다음 에피소드에서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는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그 천국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회개가 필요하다고 설교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2
세례 요한의 핍박과 투옥은 우리 각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징합니다. 박해를 받을 때, 낙담할 때, 기대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성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의 권위를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정말 가까이 있는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확고한 지지자 중 한 명인 세례 요한도 의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요한은 예수님께 메시지를 보냅니다. 요한의 제자 두 명을 통해 전달된 이 메시지는 질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정말 약속된 메시아인지 아닌지 묻습니다. "당신이 오실 분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찾아야 합니까?"라고 요한은 묻습니다. (11:3).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예수님은 요한의 사자들에게 요한에게 돌아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11:5).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예수가 재림 예수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와중에도 기적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외부 환경이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영적 평형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의심과 낙담의 메시지와 함께 지옥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외부 환경에 상관없이 우리를 새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기적적인 방법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3
군중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많은 기적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 후, 군중에게 요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시며 말씀을 전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느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11:7). 다시 예수님은 "무엇을 보러 나왔느냐?"고 물으십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 보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이 왕의 집에 있느니라"(11:8). 그러자 예수님은 세 번째로 "무엇을 보러 나왔느냐?"고 물으십니다. 선지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큰 선지자가 있느니라"(11:9).
예수님은 매번 "무엇을 보러 나왔느냐?"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에 대해 더 많이 알려주십니다. 우선, 요한은 확실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닙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시류의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확고한 신념 체계를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성서에서 의복과 옷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옷이 우리 몸을 보호하는 것처럼 진리는 우리 영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옷은 낙타 털로 만든 거칠고 가죽 벨트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거친 옷은 성경의 문자 그대로의 가르침, 특히 우리를 회개의 노력으로 이끄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이 어려운 말씀은 거칠고 투박해 보일 정도로 직설적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는 왕의 집에 거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집에 거하는 천사들의 부드럽고 빛나는 옷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 천사의 옷은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힘으로 옷을 입으십시오. 찬란한 옷을 입으십시오"(이사야 52:1). 4
거친 옷을 입은 요한은 옛 선지자, 특히 "가죽 띠를 두른 털복숭이"로 묘사되는 엘리야와 비슷합니다(2 왕상 1:8). 하지만 요한은 그 어떤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자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을 영접할 길을 준비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사람이 바로 기록된 사람입니다: '내가 내 사자를 당신보다 앞서 보내어 당신 앞에서 당신의 길을 예비하게 하리라'." (11:10). 예수님은 여기서 말라기를 통해 주어진 예언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제 그것을 요한에게 적용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말라기 3:1).
요한을 선지자 이상으로 묘사한 후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한의 역할의 특별한 특성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난 사람들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11:11).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크다"라는 경고를 덧붙이십니다.11:11).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례 요한이 말씀의 문자 그대로의 가르침, 특히 변덕스러운 인간 의견의 바람에 의해 변할 수 없는 직설적이고 진정한 진리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살인은 살인입니다. 간음은 간음입니다. 절도는 절도입니다. 거짓 증인은 거짓 증인입니다. 이 영원한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합니다.
이런 점에서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는 없다"는 말씀은 인간이 기록한 모든 진리 중에서 세례 요한이 말한 문자 그대로의 진리보다 더 위대한 진리는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문자적 진리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내적 감각의 계시입니다. 말씀의 내적 감각은 영적인 차원과 천상의 차원, 그리고 각각의 수많은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적 감각의 가장 낮은 단계까지도 설명하면서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요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고 모독되어 종교 단체가 사람들이 믿기를 바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거의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법에 불순종하면 가혹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처벌을 내렸습니다.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도구가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며 복종하게 하는 무기로 전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은 폭력을 당하고 폭력적인 자들이 강제로 차지한다"(11:12). 6
실제 적용
모든 세대에는 말씀의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진리를 무시하거나, 설명하지 않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는 세례 요한의 투옥으로 대표됩니다. 이는 사회 전반에 해당하지만,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적용을 위해 의도적으로 또는 부주의하게 계명을 무시하거나 설명하지 않은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는 종종 계명에 위배되는 행동에 대한 정당화와 합리화의 형태를 취합니다. "이 경우에는 속임수를 쓰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해도 괜찮아, 왜냐하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는 단어를 입력하세요. 여러분의 삶에서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둘 것인지 아니면 석방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평형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 거부당하다
16. 그러나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까요? 마치 어린 소년들이 시장에 앉아 동료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17.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고, 우리가 너희에게 애통해도 너희는 통곡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같다.
18.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하니라.
19.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 그들이 말하되, '보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폭식하고 포도주를 먹는 사람이로다!' 하더라. 그리고 지혜는 그 자녀들에 의해 의롭게 되었다."
세례 요한의 투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기적을 묘사하는 에피소드 후에 예수님은 "내가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하리이까"(11:16). 그런 다음 그는 당시 사람들을 "어린 소년들이 시장에 앉아 동료들을 불러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고, 우리가 너희에게 애통해도 너희는 통곡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 비유합니다("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는다").11:16-17).
예수님은 시장에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놀자고 부르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피리를 불었지만 당신은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애통했지만 당신은 통곡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부르짖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요한을 악마화하고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왔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인자가 먹고 마시러 오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라,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탐식하고 술 취한 사람이로다'라고 합니다."(11:18-19).
이것은 세례 요한이 제공하는 것과 예수님이 제공하는 것 사이의 중요한 비교를 암시합니다. 세례 요한은 말씀의 제한적인 문자적 진리를 표현합니다. 요한은 자기 부인, 개인적인 절제, 악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대변합니다. 이것이 천국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천국의 길을 준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원에 새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잡초를 제거해야 하듯이, 선과 진리를 심기 전에 악과 거짓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7
이를 염두에 두면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세례 요한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진리, 특히 십계명에 담긴 진리를 대표하여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인정하는 노력입니다. 여기에는 십계명에 위배되는 생각, 태도, 행동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포함됩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시작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을 위한 더지를 연주했습니다. 이 노래는 죽어야만 하는 낡은 태도와 행동, 고착화된 패턴을 포기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암시하는 애가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아무리 회개를 촉구해도 백성들은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옛 방식에 만족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장송곡을 부르며 옛 삶을 버리라고 촉구했다면, 예수님은 새 노래를 부르며 새 삶을 맞이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쁨과 환희의 노래와 함께 오셨습니다. 그것은 축하의 노래였습니다. 요한이 강조한 것은 금식, 즉 하나님께 죄를 짓는 악을 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치, 즉 죄가 제거된 후 새 생명의 도래를 축하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세례 요한과 구세주 예수 모두 거부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옛 방식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새 방식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한과 함께 금식하지도 않았고, 예수와 함께 잔치를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면 주님께서 즉시 하늘의 생명으로 채워주신다는 단순한 지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혜는 선한 사람의 삶의 방식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혜는 그 자녀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8
실제 적용
예수님은 현 세대를 시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비교하시면서, 이 아이들이 사실상 우리와 함께 울거나 춤을 추자고 서로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성공에만 집중하며 살아간다면, 함께 울거나 함께 춤추자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는 회개와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주님의 조용하고 내면적인 부르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여러분의 행동에서 변화해야 할 부분, 특히 저항해야 할 부분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세요. 이것이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자녀'가 회개하라고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또한 악이 기피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유입되기를 원하는 하늘의 영향력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기뻐하라고 부르는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이 악을 피하는 만큼 주님께서 그분의 선으로 여러분을 채우실 것입니다. 애통하는 것을 선택하고 춤을 배우십시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우라"(이사야 1:16-17).
경고
20. 그런 다음 그분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의] 대부분의 일이 행해진 도시들을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21. "화 있을진저, 초라 진! 화가 있도다, 벳새다야! 만일 두로와 시돈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권능의] 일들이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오래 전에 굵은 베옷과 재를 입고 회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참을 수 있으리라.
23. 하늘까지 높아진 가버나움아, 너는 지옥까지 밀려 내려가리라 네 안에서 행한 [권능의] 일이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오늘날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니라.
2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더 참을 만하리라."
금식과 잔치, 회개와 기쁨,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것 사이의 균형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성한 이야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 도시들을 비난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초라진아!"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벳새다에게 화 있을진저! 두로와 시돈에서 너희에게 행한 그 큰 일이 너희에게 행해졌더라면 그들은 오래 전에 굵은 베옷과 재를 입고 회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딜 수 있으리라"(11:21-22).
초라진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신 바로 그 지역인 갈릴리 바다 연안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그 도시에서 행한 강력한 사역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을 확신시키는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그랬죠. 그러나 다른 경우, 특히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저항하는 경우에는 예수님의 강력한 사역이 설득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압도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저항하면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지중해에 위치한 이 두 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로 묘사되는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부만으로는 어려운 시기를 버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온갖 사치스럽고 값비싼 화물을 가득 실은 두로와 시돈의 큰 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생하게 묘사하십니다. 주님은 "동풍이 너희를 먼 바다에서 산산조각 낼 것이다. 너희의 재물과 상품과 물품, 뱃사람과 선원, 선박 제작자, 상인과 모든 병사, 그리고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난파되는 날 바다 한가운데로 가라앉을 것이다."(에스겔 27:25-27).
영적으로 이 "난파선"은 영적인 목표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세상적인 야망을 추구하며 사는 삶의 허무함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에서 온 이 이교도들도 갈릴리 지역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같은 권능의 역사를 보았더라면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 누구도 무지로 인해 정죄받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의 역사 앞에서도 고집스럽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9
그런 다음 예수님은 가버나움 사람들과 소돔 사람들을 대조하여 이 강력한 경고를 반복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까지 올라간 가버나움아 너희가 지옥까지 밀려 내려가리라 너희에게 행한 큰 일이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오늘날까지 남아 있었으리라"(11:23).
창세기에서 소돔은 너무 타락하여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에는 도시뿐만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과 도시에서 자란 모든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19:25). 이 강력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주님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에게 가져오는 파멸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히 가버나움과 비교하여 소돔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능의 역사를 목격한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더 참을 만하리라"("소돔이 너희보다 더 참을 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1:24).
이 모든 것은 당시 인류가 처한 끔찍한 상황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진리의 빛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무지의 어둠이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강력한 사역으로 증명되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어둠에 너무 익숙해져서 빛이 바로 그들 가운데 있는데도 빛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러한 강력한 사역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루어졌다면 소돔의 악한 사람들조차도 믿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실제 적용
이 이야기의 이 부분의 경고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적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으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도 기적이고,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도 기적입니다. 풀이 자라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도 기적입니다. 모든 치유는 기적입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는 모든 일상이 기적입니다. 사실, 영적 변화라는 내면의 기적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적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여러분 주변에 일어나는 강력한 역사,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여러분의 삶에 계속 적용하면서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도록 하세요.
더 쉬운 멍에
25.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내가 주를 고백하오니 이는 주께서 이 일을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26.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이다.
27. 모든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이 계시하고자 하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니.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앞의 구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강력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세례 요한조차도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자, 시장에서 서로를 부르는 아이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아이들이 행복한 노래를 연주할 때 춤을 추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슬픈 노래를 연주할 때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이들의 반응이 없는 것을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자신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와서 회개를 설교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런 자제와 절제가 너무 가혹해 보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제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폭식가이자 술주정뱅이라고 부르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정죄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지나친 자제력이든 지나친 자제력이든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 거부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부름을 듣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는 대답하지 않았다"(예레미야서 7:13).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기적을 목격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그 예로 예수님은 초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의 도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지역에 있던 이 세 도시는 예수님께서 큰 권능을 행하셨던 곳이었지만 사람들은 완고한 불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로와 시돈, 심지어 소돔의 도시들도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의 역사를 목격했다면 분명히 회개했을 것입니다.
이제 신성한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예수님께서 기도와 초대를 동시에 하시면서 어조에 변화가 생깁니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에게는 이런 일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으니 감사합니다"(11:25). 이 말씀에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예수님의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지능과 자기 노력에 의존하여 행복과 성공의 길을 찾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 즉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10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가장 현명하고 가장 똑똑한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는 사람입니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자질을 가르침을 받고 배우기를 열망하며 기꺼이 인도받으려는 성품이 좋은 어린아이의 상태에 비유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감사하나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알려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실 때 언급하신 우리 각자의 모습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11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하나님이나 예수님,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한, 성경은 닫힌 책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도, 영적인 의미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지성과 노력에 의존하여 우리 자신의 행복을 창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거운 짐입니다. 그것은 부담스러운 멍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꺼이 따르는 순진한 아이들처럼 겸손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열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의 상태에 머무는 한, 주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신비를 열어주시고 내면의 경이로움을 보여주시며 우리 삶에 대한 수많은 적용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계획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 아버지 보시기에 좋사오니"(11:26). 12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은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니고서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도 없고, 아들이 계시하고자 하는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11: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의 숨겨진 것들을 교만하고 똑똑한 자들에게 계시하지 않고 겸손하고 무고한 자들에게 계시하셨다고 말씀하신 앞 구절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즉, "아들이 그분을 계시하고자 하는 자에게"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이 말씀이 신의 편애를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의 기꺼이 받으려는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만이 아닌 겸손, 오만이 아닌 순수함,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아닌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믿음과 자비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13
신성한 초대
이 말씀은 이제 말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초대에 대한 신성한 전주곡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1:28).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대신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위로의 메시지이며,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육체적 안식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영적 안식, 즉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30).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나누도록 초대받은 멍에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함께 메고 한 수레를 끌거나 한 밭을 갈 때처럼, 주님은 우리가 일상 생활의 기복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 어떤 짐도 지고, 어떤 장애물도 만나고,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혼의 안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이 구절에서 "내게로 오라"는 말씀은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아버지와 연결하여 너희가 안식을 얻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영적 안식의 근원으로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모든 전통 중에서 가장 신성한 날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히브리어로 안식일을 뜻하는 단어는 샤바트 [שַׁבָּת]로, 간단히 말해서 "휴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신성한 정체성을 드러내시며 자신이 참된 안식의 원천임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 안에서 쉬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공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엄격하고, 화를 내며, 심판하고, 징벌하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볼 수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로서 직접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드러운 연민과 무한한 용서로 충만하신 하나님, 우리 각자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림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11:28-30).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주십니다. 14
실용적인 응용
멍에란 짐을 끌거나 밭을 갈 때 두 동물이 서로 밀착하여 일할 수 있도록 두 동물의 목 위에 놓는 나무 기둥을 말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 짊어져야 할 짐이 있고 감당해야 할 부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임과 도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분개하고 화를 내거나 쉽게 상처받고 실망하는 성향이 있거나 자신이나 타인을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해와 용서를 더 많이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고착화된 태도와 행동을 바꾸기 위한 초기 노력은 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멍에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내하며 주님께 의지하여 부정적인 패턴의 거칠고 부담스러운 멍에를 이겨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얻으면, 우리의 짐이 더 가벼워지고 견디기 쉬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실천적인 적용으로, 삶의 특정 영역에서 극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 보세요. 인내심을 키우거나, 불안을 덜 느끼거나, 더 쉽게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인내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만족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용서하는 것을 더 좋아할수록 부담스러운 일이 더 가벼워지는 것을 주목하세요.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 기쁨을 느끼는 만큼,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고 약속하시는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15
각주:
1. AE 411: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함께 교회를 대표했고, 그들 각자는 교회의 중심 원리를 대표했다"며 "'베드로'는 교회의 진리(믿음), '야고보'는 선, '요한'은 행위, 즉 행함의 선, 나머지 제자들은 이 중심 원리에서 파생되는 진리와 선을 대표했다"고 설명했다.
2. AE 349:2: “사람은 선택의 자유, 즉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거나 지옥으로부터 악과 거짓을 받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은 사람의 개혁을 위해 이루어집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영적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3. AC 9209:4 “'소경'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고, '앉은뱅이'는 선은 있으나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참된 선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며, '문둥병자'는 부정한 자들이지만 깨끗해지기를 갈망하는 자들이고, '귀머거리'는 진리에 대한 지각이 없어서 진리에 대한 믿음에 있지 않은 자들이며, '가난한 자'는 말씀이 없으므로 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가르침을 받기를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 AC 9372:4: “궁극적으로 또는 문자로 된 말씀은 사람들의 눈에는 투박하고 모호하지만 내적인 의미에서는 부드럽고 빛난다는 것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지 못하리니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의 집에 있느니라'는 말씀에 의해 암시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 말씀에 의해 의미된다는 것은 '의복' 또는 '의복'이 진리라는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천사들이 선한 진리에 따라 부드럽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천사들의 거처인 '왕의 집'의 의미와 우주적 의미에서 하늘의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 AC 9372:6: “내적인 의미에서 또는 하늘에 존재하는 말씀은 외적인 의미에서 또는 세상에 존재하는 말씀보다 세례 요한이 가르친 대로 한 차원 위에 있습니다. 이는 '하늘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이며, 하늘에서 인식되는 말씀은 인간의 모든 이해를 능가할 정도로 큰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6. AE 619:16: “세례 요한은 그의 옷, 즉 낙타 털과 허리에 두른 가죽 허리띠처럼 자연스러운 말씀[문자 그대로의 성경 가르침]의 외관을 대표합니다.... 가장 외적인 의미의 말씀은 '문자의 의미' 또는 '자연적인 의미'라고 하는데, 요한이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7. 캐논 208: "자선의 첫 번째는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한 선을 행하기 전에 악에서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잔은 깨끗해져야 하지 않습니까? 깨끗하지 않으면 포도주에서 더러운 맛이 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접시도 음식이 놓이기 전에 깨끗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접시 안이 단지 불결하다면 음식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불결하고 더러운 것뿐인데 하늘로부터 순수한 것이 사람들에게 흘러들어올 수 있겠는가? 불결하고 부정한 것이 먼저 제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러므로 주님이 선으로 흘러 들어가기 전에 악이 제거되어야합니다. 그 전에 주님이 들어오신다면 선이 악으로 변하여 악을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악을 제거하고 그 후에 선이 흘러 들어와 개인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악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십계명의 교훈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은 먼저 제거되어야 하며, 악이 제거되는 것과 비례하여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8. AE 768:9: “영적인 의미에서 '씨'라는 단어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고 '자손'은 신성한 진리에 따른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손'은 신성한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생명:1: "모든 종교는 생명과 관련이 있으며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도 참조하세요. '
9. AC 2335:3: “주님은 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며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하늘로 올리기를 원하시며, 실제로 가능하다면 그분 자신에게도 그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자비 그 자체와 선 자체는 결코 누구도 정죄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선을 거부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합니다." 참고 문헌 AC 2258:3: “악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옥으로 정죄합니다.... 그들은 신의 선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지만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옥으로 보냅니다."
10. TCR 839:2: “내부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비교하면 항아리에 담긴 물의 양과 호수에 담긴 물의 양이 같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외부 사람들은 자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11. 천국의 신비 1767: “편지에서 말씀은 거칠고 불완전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내면에는 선한 영과 천사가 말씀을 읽을 때 완전히 볼 수 있는 영적이고 천상의 것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참고 항목 천국의 신비 10400: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내면이 없는 외적인 사람들은 모두 내면이 닫혀 있고 외면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부 사람들이 내면이 없는 말씀을 읽을 때 그들은 두꺼운 어둠 속에서 보게 됩니다. 하늘의 빛이 없는 자연적인 루멘은 영적인 문제에서 두꺼운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의 빛이 내부를 통해 외부로 들어올 때, 거기에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12. 천국과 지옥 281: “'어린아이'라는 단어에서 '어린아이'는 순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순결은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의지이기 때문에 선은 그 안에 순수함이 있는 한 선한 것입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5608: “하늘에서 가장 안쪽 또는 세 번째 하늘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죄한 사람들로 구성되며, 주님은 무죄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유와 어린아이가 순수하기 때문에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13. AC 2327:3: “마음이 겸손한 자기애와 그로 인한 모든 악이 끝나는 한, 선과 진리, 즉 자선과 믿음이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자기애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자료 천국의 신비 9377: “겸손 없이는 주님을 경배하거나 숭배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과 주님의 것은 교만한 마음, 즉 자기애로 가득 찬 마음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단단하고 말씀에서 '돌의 마음'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겸손한 마음, 즉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마음, 즉 주님의 유입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만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14. 참된 기독교 163: “천국 전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에 기초하고 있으며, 지상의 모든 교회와 일반적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상은 결합으로 이어지고, 결합을 통해 빛과 지혜,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15. 천국의 신비 905: “선과 진리를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 사람은 더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께서 사람들을 악령의 지배와 멍에에서 해방 시키실 때 전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해방되었을 때, 즉 중생했을 때, 그들은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주님의 부드러운 인도를 받아 멍에나 지배의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기쁨과 행복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에 주님의 인도를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참조 항목 천국과 지옥 533: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은 이제 사람들이 부정직하고 불의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마음이 기울어지는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그것이 신성한 계율에 반대되기 때문에 그렇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만하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습관이 생기면 점차 하늘과 결합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시작했을 때 주님은 그들 안에있는 모든 선한 것을 빠르게하고 악을 악으로 볼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삼가고 마침내 그것에서 멀어지게합니다. 이것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