步骤 13: Study Chapter 6

     

마가복음 6장의 의미 탐구

参见书目信息

6장

믿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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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셔서 자기 나라로 들어오시니 제자들이 주를 따르니라.

2. 안식일이 이르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듣는 많은 사람이 궁금히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일을 하는가? 그에게 주신 지혜가 무엇이기에 이 같은 [권능의] 일조차도 그의 손으로 행하시나이까?

3.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인 목수가 아니냐? 그리고 그분의 누이들도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그분에게 기분이 상했다."

4.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는 자기 나라와 친족과 자기 집에서 외에는 명예가 없는 것이 아니다." 4.

5. 그리고 그분은 병든 몇 사람에게 [그분의] 손을 얹어 고치신 것 외에는 어떤 [능력의] 일도 할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분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놀라워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온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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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에피소드에서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은 모두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딸을 육체적 죽음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서로 얽혀 있는 이 두 에피소드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질병과 죽음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대조적인 그림, 즉 우리의 믿음이 제한되어 있고 우리 안에서 "권능의 역사"를 행할 수 없을 때의 그림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상태는 예수님이 자신의 나라에 오셨을 때 마주친 불신앙의 상태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는 자기 나라, 자기 친척, 자기 집을 제외하고는 명예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 복음 6:4). 상황은 "그분은 병든 사람 몇 명에게 안수하여 고치신 것 외에는 어떤 큰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마가 복음 6:5).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적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크면 예수님은 큰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된 사명이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 하거나 사람들이 그분을 믿도록 강요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믿지 않는 곳보다 기적을 행하기에 더 좋은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기적은 사람들이 가장 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하지 않으 셨습니다. 더욱이 강요된 믿음은 자유롭게 선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이성, 즉 우리의 의지와 관련된 믿음의 자유와 우리의 이해와 관련된 지적 능력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 이성의 자유로운 행사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길입니다. 외적인 기적을 통해 믿음이 강요될 때 이성은 위축되고 자유는 부정됩니다. 1

복음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 이야기와 기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신성을 소개하기 위해 기적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받아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말씀의 모든 이야기, 모든 비유, 모든 기적에는 우리의 영적 삶에 대한 보다 내면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육체적 치유는 어떤 영적 상태의 치유에 관한 것이며, 예수님께서 자연의 힘을 진정시키는 능력을 보여 주실 때마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그분의 능력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적 이야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뜻을 더 내면적으로 이해하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기적 중의 기적, 즉 변화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2

실용적인 응용

이 에피소드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그들의 불신앙에 놀랐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몇 가지 치유를 제외하고는 "그분은 그곳에서 권능의 행위를 할 수 없었다". 믿음이 부족하면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권능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제한될까요? 또는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그분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 부여하나요?

제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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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두 사람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8. 그리고 그들에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배낭도, 빵도, 허리띠에 놋쇠도 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9. 그러나 샌들을 신고 두 벌의 튜닉을 입지 말라.

10.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나올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라.

11.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은 거기서 나갈 때에 발 밑의 먼지를 털어서 그들에게 [반대]하는 증거를 삼아라.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소돔이나 고모라가 그 도시보다 더 견딜 수 있으리라."

12. 그리고 나가서, 그들은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든 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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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될 사람들의 이름을 발표하셨습니다(마가 복음 3:13-15). 그러나 그 사건은 단지 첫 번째 임명일 뿐이었으며, 곧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현실이 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두 사람씩 파송하기 시작하셨고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다"(마가 복음 6:7).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습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마가 복음 6:8). 성경 시대에 지팡이는 목동들이 양을 통제하는 수단이자 여행 중에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로 사용되었습니다. 왕이 직책을 맡았을 때 오른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 또는 홀은 왕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팡이는 목동이든 왕이든 자연계에서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더 내면적으로는 주님으로부터만 우리에게 오는 신성한 진리에는 모든 힘이 담겨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지지하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파송되었다는 것은 제자들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라는 의미였습니다. 3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짝을 지어 보내시면서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가방도, 돈도, 갈아입을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생명의 지팡이가 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선포하고 좋은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그들과 함께 머물며 계속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들은 단순히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마가 복음 6:8-11).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걱정하거나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전파하라고 위임하신 신성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현실의 본질입니다. 선한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듣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과 악귀들은 진리를 싫어하고 대신 그들의 악한 욕망을 뒷받침하는 거짓 믿음을 선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거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절당하거나, 거부당하거나, 외면당하는 것은 그들에게 조금도 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악의 힘은 악에서 비롯된 거짓과 함께 먼지와 같습니다. 그것은 지속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먼지를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4

분명히 제자들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쳤습니다"(마가 복음 6:12-13).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바로 뒤따르는 회개가 이 복음에서 계속해서 중심 주제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나가서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한다고 선포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과 헤로디아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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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헤롯 왕이 들으니 이는 그의 이름이 드러났음이라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니 그러므로 [권능의] 역사도 그에게서 일어난다 하더라.

15.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선지자 또는 선지자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16. 그러나 헤롯이 듣고 말하기를, "내가 참수한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하였다.

17. 헤롯이 보낸 자가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우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이었다.

18. 요한이 헤롯에게 이르되 "네가 네 형의 아내를 가지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니라" 하니라.

19.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더라,

20. 헤롯이 요한이 의인이요 거룩한 줄 알고 두려워하여 그를 보호하고 그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을 행하며 즐거이 들었더라.

21. 적당한 날이 이르렀을 때에 헤롯이 그의 생일에 그의 큰 자들과 천부장과 갈릴리의 첫 [자들]을 위하여 만찬을 베풀었더라.

22. 그 딸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 춤을 추며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니, 왕이 그 처녀에게 이르되,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주리라" 하더라.

23. 그리고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시되,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나라의 절반까지 네게 주리라." 하셨다.

24. 그 여자가 나가서 어머니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하매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이시니이다." 하니라.

25. 곧바로 왕께로 급히 들어가서 청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즉시 접시에 담아 내게 주옵소서." 하니, 25.

26. 왕은 매우 슬퍼하면서, [그러나] 맹세한 자들과 함께 앉은 자들을 생각하여, 그녀를 내쫓지 아니하였다.

27. 왕이 곧 사형 집행인을 보내어 그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하니, 사형 집행인이 가서 감옥에서 그를 참수하였다.

28. 그 머리를 접시에 담아 처녀에게 주니 처녀가 그 머리를 자기 어머니에게 주더라.

29.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와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넣었더라.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서, 자기들이 행한 일과 가르친 모든 것을 예수께 보고하니라.

3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스스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조금 쉬라 오가는 자가 많아 먹을 기회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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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에피소드 말미에 제자들이 두 사람씩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에피소드의 마지막 말에는 "그들은 나가서 사람들이 회개해야한다고 설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마가 복음 6:12).

이전 에피소드의 마지막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회개하다"입니다. "회개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μετάνοια(메타노이아)로, "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메타"와 "생각" 또는 "마음"과 관련된 "노이아"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회개하다"라는 단어의 근본적인 의미는 마음을 바꾸거나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습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유익한지를 기준으로 보았지만, 회개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설계의 관점에서 보는 법을 배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에서 우리는 최고의 기쁨을 찾습니다. 5

이것은 사람들이 회개의 과정을 거치면서 배울 수 있는 더 높은 진리의 한 예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리는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직하게 살피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이기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더 높은 진리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행동하는 새로운 방식,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존재 방식의 시작입니다. 6

사람들이 삶에서 이미 선을 행하고 있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회개에서 시작되는 최종 결과물인 선한 행위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동기와 욕망이 올바른 곳에 있지 않으면 누구도 진정으로 선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적인 선행을 충분히 행하면 자신이 생각하고 행하는 악을 보상하거나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발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도하는 바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내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7

이 모든 것,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이 "회개"라는 단순한 단어의 의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술로 고백한 다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를 없애 주셨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구원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계명에 따른 삶이 수반되어야 하며, 계명은 모두 피해야 할 특정한 악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전파하도록 파견된 기쁜 소식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소식, 즉 참된 복음은 회개의 필요성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위한 회개를 설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마가 복음 1:4). 8

그러나 회개의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헤롯 왕으로 대표되는 가장 강력한 적 중 하나를 만납니다.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인 사악하고 권력에 굶주린 독재자 헤롯 왕은 원래의 헤롯 왕이 아닙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만큼이나 잔인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인기가 높아진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은 걱정스러워합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세례 요한은 먼저 감옥에 갇힌 다음 참수형을 당합니다. 이제 그는 요한이 예수의 인격으로 죽음에서 돌아왔다고 미신적으로 두려워합니다. "헤롯은 "내가 참수한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마가 복음 6:16).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헤롯의 생각이 아니었고 그를 참수하는 것도 그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실제로 "헤롯은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줄 알고 두려워하여 ... 그의 말을 듣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가 복음 6:21). 그러나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는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전에 헤롯의 형과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헤롯과 함께 살기 위해 그를 떠났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네가 네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자 헤로디아는 분노했습니다. "그러므로 헤로디아가 그를 악의로 붙잡아 죽이려 하였더라"라고 기록된 대로(마가 복음 6:18-19).

이 단어의 표면 아래를 살펴보면 성경의 문자 그대로의 진리와 마주했을 때 인간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세례 요한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대표하는 세례 요한은 십계명 중 하나인 "간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인간의 이해는 살인, 도둑질, 거짓말이 잘못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의로운 법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타락한 인간의 의지의 요구를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는 요한(말씀의 편지)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마음에 두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패한 의지가 새로운 통찰의 가능성을 가두어 두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패한 의지가 완전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로운 가르침을 가두는 데 그치지 않고 파괴해야 합니다. 다음 장면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헤롯 왕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헤롯 왕은 딸의 춤에 너무 기뻐서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심지어 왕국의 절반까지 주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에 딸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다가가 "무엇을 구할까요?"라고 묻습니다. 헤로디아는 즉시 "세례 요한의 머리"라고 대답합니다.

회개의 탁월한 설교자인 세례 요한의 목을 먼저 가두어 참수하라는 헤롯의 명령에 담긴 영적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열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때, 그들은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선포해야 했습니다(마가 복음 6:12). 그러나 이 에피소드에서는 부패한 인간의 의지가 회개를 "좋은 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타락한 의지는 변화하려는 욕구가 없고 따라서 변화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과 회개하라는 요청을 자신의 행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어야 할 위험으로 여깁니다.

헤롯과 헤로디아의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을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와 의지, 우리의 생각과 애정,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헤롯과 그의 아내 헤로디아. 헤롯 왕은 모든 사람의 이해, 즉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대표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헤로디아는 모든 사람의 의지, 즉 우리의 감정과 애정을 대표합니다. 생각과 느낌, 이성과 애정은 모든 개인의 본질적인 본성을 구성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해는 천국의 빛으로 완벽하게 고양되어 천사들만큼이나 신성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가 함께 높아지지 않으면 이해는 다시 의지의 수준으로 끌려 내려갑니다. 새로운 이해가 오래된 의지를 지배해야하지만, 종종 그 반대 인 경우가 많습니다. 옛 의지가 이해를 지배하고 이해를 종속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헤로디아는 헤롯을 다스립니다. 이것은 깊은 사랑이 위협받는 사람과 추론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설명합니다. 반대로, 이미 제안된 것을 사랑하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종종 생각이 애정을 낳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내면의 진실은 애정이 생각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9

그렇다면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혼은 우리에게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악한 의지(헤로디아)와 왜곡된 이해(헤롯)의 결합, 즉 악한 의지의 지배를 허용하는 이해의 결합입니다. 종합하면, 이런 종류의 음탕한 동맹을 "악과 거짓의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자손은 파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이해와 의지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10

우리 안의 헤롯과 헤로디아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또는 "어린양의 피로 씻기면 아무것도 해칠 수 없다"와 같은 쉬운 진부한 표현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을 선호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진술에는 진실이 있지만, 좋은 소식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을 통한 구원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강력하고 삶을 변화시키며 자아에 도전하는 말씀의 명령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 계명들은 우리에게 자기 성찰이라는 어려운 일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듭나지 못한 이기적인 본성은 이러한 좁은 제한이 없다면 삶이 훨씬 더 쉬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저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강력하고 문자 그대로의 진리는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낮은 본성이 아무리 무시하고, 감옥에 가두고, 궁극적으로 참수해도 우리의 높은 본성은 계속해서 그들을 경외심과 명예로 대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은 요한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안치했다"(마가 복음 6:29). 11

말씀의 문자적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종종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의 헤롯과 헤로디아에 의해 공격을 받습니다. 더 깊게는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이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악과 거짓으로 왜곡하여 효과적으로 파괴하고자 하는 시기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예수님께로 돌아가 기도로 그분과 교제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께 돌아가서 생계를 유지하고, 영혼을 쉬게 하고, 진정한 "생명의 지팡이"인 하늘의 떡으로 영양을 공급받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사도들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그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그분께 말씀드렸다"는 구절을 읽게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식사할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마가 복음 6:30-31). 12

첫 번째 기적의 먹이주기: 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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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리고 그들은 혼자서 배를 타고 황량한 곳으로 떠났다.

33. 군중이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분을 알고 모든 도시에서 걸어서 함께 그곳으로 달려가서 그분 앞에 이르러 함께 그분께로 나아오니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많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이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시니라.

35.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났을 때,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여기는 황량한 곳인데,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36. 그들을 보내어 사방 들과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그들은 먹을 것이 없나이다." 하셨다.

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에게 먹으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이르되,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을 사서 그들에게 주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그들이 알고 나서 말하기를,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하였다.

39.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모두 푸른 풀밭에 [무리를 지어] 누우라고 하셨다.

40. 그리고 그들은 수백 명씩, 50명씩 무리를 지어 [그리고] 그룹으로 기대었다.

41.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사하시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 앞에 놓으시고, 물고기 두 마리는 제자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제자들이 다 먹고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그들은 바구니 열두 개에 조각과 물고기를 가득 담았다.

44. 떡 덩어리를 먹은 사람은 남자만 오천 명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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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장이 끝날 무렵, 지친 사도들은 예수님께 돌아와 쉴 수 있는 조용한 장소로 데려갑니다. 제자들이 선교 활동에 참여할 때마다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사도들은 선교 활동으로 매우 바빴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식사할 시간도 부족할 정도'(마가 복음 6:31). 이전 에피소드의 이 엔딩은 사실 다음 에피소드의 도입부로, "그리고 그들은 혼자서 조용한 곳으로 사라졌다"는 말로 시작됩니다.마가 복음 6:32). 모든 것이 오가는 영적 여정에서 우리는 휴식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할 수 있는 시간,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간에는 우리의 자연적인 욕망이 복종하여 주님의 말씀의 진리가 자기애와 세상 것을 소유하려는 사랑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3

그러나 사도들은 조용한 곳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열망에 가득 찬 군중들이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받기 위해 찾아온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으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녁이 될 때까지(마가 복음 6:34). 한편 제자들은 피곤하고 배고프고 쉬고 싶어합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사오니 저들을 주변의 들과 마을로 보내어 스스로 먹을 빵을 사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마가 복음 6:36).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것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마가 복음 6:37).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 상당의 빵을 사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까요?"라고 걱정스럽게 대답합니다.마가 복음 6:37). 이백 데나리온은 약 이백 일의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걱정을 제쳐두고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마가 복음 6:38).

다음으로, 히브리어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몸짓으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향하여 "푸른 잔디에 기대어"(마가 복음 6:39). 경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한 다윗 왕의 말씀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 내 영혼을 회복시키시나이다(시편 23:1).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으로 보시는 이 무리는 하늘의 목자께서 푸른 초장으로 그들을 먹이러 오셨다는 것을 말씀으로 부드럽게 암시하는 그분께 먹이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군중을 푸른 잔디에 앉히신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라는 지시와 함께 돌려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행합니다.

먹이는 일의 중요성

몇 회 전,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직후에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가 복음 5:43). 육체적 영양은 영적 영양을 상징합니다. 육체적 음식을 먹음으로써 육체가 소생하는 것처럼, 영적 음식을 먹음으로써 영이 소생합니다. 성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영적 식사"라고 부르며 계시의 근본적인 주제입니다. 14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너희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이 에피소드가 "그러자 사도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로 시작되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마가 복음 6:30). 마가가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유일하지만, 오천 명을 먹이기 직전이라는 문맥에서 단어 선택이 특히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훈육과 훈련 아래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로서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른 사람들을 먹이고 축복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그분의 사도로 파송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제자"가 "사도"로 불릴 때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직접 먹이시고 구원하시겠지만, 그분은 사도들을 통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음 몇 구절을 주의 깊게 읽으면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축복하신 후 사도들에게 주시고, 사도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빈약하고 지치고 피곤해도 우리가 가진 작은 사랑(빵 다섯 개)과 작은 진리(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린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오는 모든 것을 축복하고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진 사랑과 진리가 아무리 작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엄청나게 커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먹고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조각과 물고기로 가득 찬 바구니 열두 개를 차지했습니다. 이제 빵을 먹은 사람은 약 오천 명이었습니다."(마가 복음 6:42-44). 15

제2의 바다의 잔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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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그리고 곧바로 제자들에게 배에 올라타서 그분보다 먼저 반대편 벳새다로 가라고 하셨고, 그분은 군중을 내보내셨다.

46. 그리고 제자들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 기도하셨다.

47. 저녁이 되자, 배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고, 그분은 육지에 홀로 계셨다.

48. 그분께서 제자들이 노를 젓다가 흔들리는 것을 보셨으니 이는 바람이 그들과 반대됨이라 밤 네 시쯤에 바다 위를 걸으시며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지나가시려고 하셨더라.

49.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바다 위를 걷는 것을 보았을 때, 그분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외쳤다;

50. 제자들이 모두 그분을 보고 놀라더라.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믿음을 가지라, 나는 살아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51. 예수께서 그들에게 배로 올라가시니 바람이 고요하니, 그들이 더욱 크게 놀라며 놀라워하더라;

52. 그들이 떡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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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타게 하시고 그분보다 먼저 반대편 벳새다로 가시고 무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읽습니다(마가 복음 6:45).

다시 한 번, 그들은 "제자" 또는 "배우는 자"이며, 이번에 배워야 할 교훈은 예수님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폭풍을 잔잔하게 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교훈과 유사합니다(마가 복음 4:35-41),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는 제자들이 반대편으로 건너갈 때 예수님이 배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큰 풍랑이 일어났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작은 믿음"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주님이 배에서 잠만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재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유혹은 더 깊은 수준입니다. 기록된 대로 "제자들을 보내신 후 산으로 떠나 기도하시니라"(마가 복음 6:46).

그림은 극적입니다. 열두 제자가 모두 바닷가에 내려와 노를 젓고 어둠 속에서 노를 저으며 강풍이 부는 가운데 노를 젓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저 멀리 산 위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항상 곁에 계시며 영접을 촉구하고 촉구하십니다.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은 우리가 영적 진리를 배울 때 그 진리 안에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의 마음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의심이 생기고 좌절감을 느끼며 영적인 진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바람을 거슬러 노를 저으며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절망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바다 위를 걷는"(마가 복음 6:49). 이것은 그분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누가 "바다의 파도를 밟을" 수 있습니까(욥기 9:8)? 이것은 우리가 의심하는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분의 말씀이 참되고 그분의 약속이 실제임을 확신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그림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배에 오르시면서 "기운 내라! 내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마가 복음 6:50).

주님께서 다시 한 번 그분의 말씀("배에 오르셨다")을 볼 때, 즉 우리가 배우고 있는 진리가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을 때 의심과 유혹의 바람이 멈춥니다. 경건한 경외감으로 가득 찬 큰 평온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기록된 대로 "그러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배로 올라가시니 바람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크게 놀라고 경탄했습니다."(마가 복음 6:51).

예수님은 앞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후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다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때, 우리는 제자들이 얼마나 느리게 배우는지, 얼마나 잊어버리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인내심을 가지고 계신지 상기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얼마 전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이 놀랍게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해는 느리고 잊는 것은 빠른 제자들은 다시 의심의 늪에 빠집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아직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이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기록된 대로, "그들이 떡에 대하여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졌음이라"(마가 복음 6:52).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를 그분의 사도로 부르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르셨지만, 우리는 또한 그분의 임재와 능력을 끊임없이 배우면서 오랜 기간의 제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처음 열두 제자처럼 우리도 그분의 사랑의 임재를 계속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두 번째 기적을 행하셨던 것처럼 군중을 먹이시는 또 다른 기적을 행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웠던 것처럼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배우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위대한 지혜와 지칠 줄 모르는 인내로 우리가 마음이 더 이상 굳어지지 않아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 같은 교훈을 반복해서 배울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해 주십니다.

더 많은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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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그들이 건너가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해안에 이르렀다.

54. 그들이 배에서 나오자, 곧바로 그분을 알았다,

55. [그리고 온 시골을 돌아다니며 병든 사람들을 간이 침대에 태우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그분이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56. 예수께서 마을이나 도시나 들로 들어가시는 곳마다, 그들은 병자들을 시장에 내어놓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게 해 달라고 간청하니, 만지는 자마다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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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겐네사렛으로 가서 닻을 내립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그 지역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마을이든 도시든 시골이든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그들은 병자들을 장터에 눕혔다"(마가 복음 6:56).

마가복음이 어떻게 뚜렷한 에피소드 패턴을 따르고 있는지 주목하세요. 바람과 파도가 처음 잔잔해진 직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갑니다. 뭍에 도착하자마자 예수님은 즉시 수많은 사람들(귀신 들린 가이사랴 사람, 야이로의 딸, 혈루증 여인 등)을 치유하기 시작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두 번째 바다 잔잔케 하심을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수많은 치유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받습니다."사람들이 주님께 옷자락만 만져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았습니다."(마가 복음 6:56).

우리는 말씀에 나오는 모든 육체적 행동이 영적 현실의 어떤 측면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할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은 종교의 가장 단순하고 외적인 일을 기억하는 것을 통한 영적 치유를 나타냅니다. 옷의 테두리, 즉 옷자락은 옷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부분이지만 다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계명도 이와 비슷합니다. 십계명을 영적으로 이해하면 십계명에는 신성한 진리 전체가 담겨 있고 그 안에 주님의 사랑 전체가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옷자락과 테두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옷자락에 술을 만들라 ... 너희가 그것을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행하게 하라"(민수기 15:37-39). 12

"그분의 옷자락"으로 상징되는 이 가장 외적인 진리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사랑의 치유력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종교의 단순하고 외적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복잡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이 진리를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마음과 정신이 변화하는 영적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당시 겐네사렛 땅과 그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우리 각자에게 중요한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성한 계명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도 영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입니다. 정말 간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한 사람들로 대표됩니다: "그분을 만진 자마다 나음을 얻었더라"(마가 복음 6:56).

脚注:

1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7290:2: “기적은 믿도록 강요하고, 믿도록 강요된 것은 남지 않고 바람에 날려버린다.... 이것이 오늘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또한 참조 주님의 신성한 섭리 130: “우리가 자유롭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주님의 신성한 섭리의 의도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그 기적을 믿도록 강요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두 가지 능력은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2천국의 신비 4637: “주님께서 비유에서 언급하신 모든 세부 사항은 그분의 왕국의 영적, 천상적 속성을 대표하고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부 사항 안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고, 그 의미는 영적이고 천상의 내용이 빛과 불꽃처럼 하늘 전체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 감각은 문자의 감각보다 완전히 우월하며, 모든 구절과 모든 단어, 실제로 모든 작은 글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3묵시록 설명 726: “'지팡이' 또는 '지팡이'라는 용어는 권능을 의미하며 신성한 진리를 전제로 합니다... 주님만이 권능을 가지시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통해 권능을 행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는 한, 그들은 권능입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4013: “'지팡이'[또는 '지팡이']는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며, 목자가 양떼를 다스리는 데 사용하거나 몸을 지탱하는 데 사용되는 등 모든 곳에서 권력을 상징합니다. 또한 오른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의미하며, '손'은 권력을 의미합니다."

4종말 설명 365:8: “영의 세계에서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오면 악에서 악이 흘러 들어와 약간의 교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바닥에 해당하는 가장 외부적인 부분만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돌아서서 떠날 때 마치 발바닥에 묻은 먼지를 뒤에서 털어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악이 그들에게 달라 붙지 않고 오히려 악에 속한 사람들에게 달라 붙는다는 표징입니다." 참조 요한계시록 풀이 183: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좋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사랑하고 선의 진리는 거짓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들었을 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합니다."

5천국의 신비 452: “천국은 자신보다 남을 위해 더 나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진심 어린 소망과 이기적인 의도가 아닌 사랑으로 남을 섬기고 그들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열망으로 구성됩니다."

6주님의 신성한 섭리 114[3]: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보고 인정한 다음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은 없고 정죄만 있을 뿐이라는 것은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의 공통된 종교적 신념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이 신성한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7참된 기독교 535: “사람들은 선한 행동에 관여하기 때문에 악한 행동에 관여하지 않으며 심지어 선함이 악을 덮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친구여, 악을 삼가는 것이 선의를 얻는 첫걸음입니다. 말씀은 이것을 가르칩니다. 십계명이 그것을 가르칩니다. 세례가 그것을 가르칩니다. 성만찬이 그것을 가르칩니다. 이성도 그것을 가르칩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어떻게 악에서 벗어나거나 악을 몰아낼 수 있을까요? 내적으로 정화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선함이 진정으로 선해질 수 있을까요?"

8새 교회 교리 52에 대한 간략한 요약: “오늘날 자신의 악을 직시하고 실제 회개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참으로 이것은 오늘날 복음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입니다."

9묵시록 설명 11 75:4: “생각이 애정을 낳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오류입니다.... 애정이 이유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유를 왜곡하거나 거부하거나 소멸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항목 천국의 신비 7342: “'의지'라는 표현은 사람의 사랑에 속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사람의 삶이기 때문에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이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면, 사람의 삶 전체는 그러한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욕망에 저항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항할 수도 없습니다."

10새 교회 교리 48-49에 대한 간략한 요약: “선과 진리의 결합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잉태될 수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선한 일은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잉태되고 태어나고, 악한 일은 악과 거짓의 결합에서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1555: “모든 사람에게는 의지와 이해라는 두 가지 부분이 있는데, 의지는 일차적인 부분이고 이해는 이차적인 부분입니다. 사람의 죽음 이후의 삶은 지적인 부분이 아니라 의지적인 부분에 따라 결정됩니다."

11묵시록 설명 619:16: “세례 요한은 말씀의 외적인 의미를 대표했습니다. 이는 낙타 털로 된 옷과 허리에 두른 가죽 띠로 상징되는데, '낙타 털'은 말씀의 외적인 것, 즉 가장 외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가장 외적인 감각을 문자 감각 또는 자연 감각이라고 하는데, 요한이 옷과 음식으로 대표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12천국의 신비 681: ” 천사와 영의 생명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음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유지됩니다. 상황이 이렇습니다: 주님만이 모든 사람의 생명이십니다. 천사들과 영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천사, 영, 인간이 이 양식을 빼앗긴다면 그들은 즉시 마지막 숨을 거둘 것입니다."

13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6567:2: “거듭난] 사람은 진리가 가르치는 것을 애정에서 행하며, 자연이 아무리 원하더라도 그 애정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애정과 그로부터 나오는 이성의 힘은 사람 안에서 지배하며,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의 기쁨을 그 통제하에 가져다줍니다....... 마침내 그 통제가 너무 완벽해지면 자연스러운 욕망은 [복종하고] 조용해집니다."

14새 예루살렘 교리 220: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은 선의 전유와 결합을, '마신다'는 것은 진리의 전유와 결합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배고프고 먹고 싶어한다는 것은 애정에서 선과 진리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조 예레미야서 15:16: “주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먹었더니 주님의 말씀이 제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15종말 설명 430:15: “'떡'은 재화를, '물고기'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을, '열두 조각 바구니'는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이 풍성하고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기독교 287: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십계명은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일반적인 원칙을 담고 있으며, 영적이고 천상적인 의미에서 십계명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참조 항목 참된 기독교 289: “영적 의미와 천상적 의미에서 십계명은 교리와 삶의 모든 교훈, 즉 신앙과 자선의 모든 것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의 모든 것에 담긴 말씀은 ... 영적 감각과 천상적 감각이라는 두 가지 내적 감각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속의 신성한 진리와 열 속의 신성한 선은 이 두 가지 감각에 있습니다."